화종부 목사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터뷰 정병오 | 정리 홍인기 | 사진 한성준
화종부 목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내수동교회에서 대학부를 지도하다가 영국에 건너가 에딘버러 대학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였다. 영국 옥스포드 한인 교회를 담임했고, 현재 제자들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jongboohwa@hanmail.net
2010 기독교사대회의 주강사이신 화종부 목사님을 찾아갔다. 5월 3일, 목사님은 남서울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고 계셨는데, 우중충한 날씨를 날려 버릴 만큼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최근에 다이어트 중이셔서 훨씬 날씬한(?) 모습의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목사님은 다이어트 덕분에 주름이 많이 늘었다고 하시는데, 주름이 늘어나는 것이 다이어트 때문인지 웃음 때문인지 알 길은 없다.
대학에서 일반 전공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사가 되셨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목회자로의 부르심을 확인했습니까?
대학에서 정치 외교를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3학년 때까지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멋진 기독 정치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가 되기 위해 한국 사회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고, 통일을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 근현대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저는 두 가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면서 역사의 중요한 기점에 제대로 일어선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정치가 우리나라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저 자신에 대한 좌절감이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저 자신의 죄성과 한계에 대해 깊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깊은 절망 가운데 주님이 저를 목회로 부르셨습니다.
목회자로 한 번의 부르심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후 목회자로서의 길을 가면서 회의를 하거나 또 다른 부르심을 경험하기도 하잖아요?
저의 경우 이때 주님의 부르심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번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 중에서는 여호수아 1장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너무나 분명한 부르심을 경험했기에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한 번 정도 약간 고민한 것 외에는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목회자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대학 생활을 하던 1970년대는 캠퍼스가 민주화 운동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을 텐데, 정치가를 꿈꾸던 기독 학생으로서 당시 민주화 운동과는 어떤 연관을 맺었나요?
정치에 대한 저의 꿈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복되게 하자는 동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마르크시즘에 근거한 민주화 운동 세력과는 관련을 맺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때 방법론 면에서는 마르크시즘이 앞서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과 마르크시즘을 통합해 보려는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방법론에 있어서도 마르크시즘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교회 홈페이지에 실린 목사님의 인사 말씀을 들어 보면 ‘선포되는 말씀’에 목사님의 목회의 중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강조는 소그룹 성경 공부나 제자 훈련을 강조하는 최근 한국 교회의 흐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제 강조점은 ‘선포되는 말씀’에 있다기보다는 ‘예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이자 중심에 선포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심방, 소그룹, 제자 양육 등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나 제자 양육을 통해 사람을 기를 수도 있지만 저는 예배를 통해 사람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부터 13년 동안 제자 훈련을 받았고, 또 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정현 목사님이 대학부 전도사님이셨는데, 그의 지도 아래 제자 양육과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 훈련의 경우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삶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자 양육이나 소그룹 성경 공부 방식은 사람들을 자꾸 교회로 불러 모으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실제로 기대만큼 굵직한 사람이 안 키워졌습니다. 제자 훈련이나 소그룹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이 만져 주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배가 잘 되면 주중에 따로 모이지 않아도 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을 제대로 경험하기만 하면 좋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일꾼을 키워 삶의 자리로 보내는 좋은 방법입니다.
한동안 열린 예배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어리석은 개념입니다.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가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인 예배의 자리에 불신자들이 참석해야 불신자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저도 제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리긴 하지만 금요 기도회 설교만 올리고 있고 지금도 주일 예배 설교는 올리지 않습니다. 안 올리는 이유는, 말씀은 예배의 자리에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지식은 커지지만 삶이 못 따르는 이유는 진정한 예배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한 말씀을 듣는데도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는 말씀을 공급을 받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즘 대학생 선교 단체 수련회에서 구도자 그룹을 대상으로 따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더라도 저녁 말씀은 함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오직 설교라야 한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뿐 아니라 말씀 묵상이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도 오는데, 이런 것과 구분되는, 설교만이 갖는 독특한 역할은 무엇입니까?
큐티나 성경 공부는 말씀을 나누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는 본질적으로 복종하거나 부인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큐티나 개인 성경 공부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이 말씀의 진정한 맛을 체험하는 방식은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는 기본 자세는 복종이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굴복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계시성은 설교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이 중심이 되면서 큐티와 성경 공부가 함께 가야 합니다.
주로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목사님은 어떤 마음으로 말씀 앞에서 서시는지요?
하나님과 성도가 주(主)고 나는 종입니다. 나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설교자도 소모품처럼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여야 합니다. 잊혀야 할 존재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과 성도의 중간에 서 있으면 안 됩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서 듣는 자로 준비되려고 노력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듣고, 나는 빠져 주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보면 ‘조국 교회’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한국 교회’가 아닌 ‘조국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한국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를 대상화시킵니다. 조국 교회는 교회를 내 일부로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조국 교회가 살기 원합니다. 조국 교회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소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저도 한국 교회를 참 많이 비판했습니다. 가능성이 있을까 하고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은 영국에 가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국에 가서 보니 너무도 확연하게 조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훌륭한 교회의 전통과 역사가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르침이 연약해도 분명히 조국 교회에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일단 한국 교회가 돌아갈 수 있는 과거 시대는 없어 보입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시대가 유일합니다. 한국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서야 합니다. 최근 서구 교회에서 은사주의로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사례가 있지만, 이러한 모습은 지속될 수 있는 모델은 아닙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으로 펼쳐지는 하나님과 존재와 구원, 하나님나라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언과 병 나음은 위로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말씀과 성령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기회를 주실 걸로 믿습니다.
목사님께서 훈련을 받아 왔던 내수동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학․청년 사역이 활발했던 몇몇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교회들이 대학 선교 단체와 더불어 많은 기독 청년들을 양육했고, 이들 가운데는 목회자로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전에 청년 사역의 중심에 있던 분들이 이제 교계의 주류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성경에 충실하려고 애썼던 그룹입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투입돼 보니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야 되는 것이지, 좋은 훈련 프로그램이나 성경 연구가 사람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거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시스템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결과를 인과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납작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생명은 원리를 충족시키면 되는 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자가 많아도 인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역사하도록 낮아져야 합니다.
목사님과 같은 시대 훈련을 받았던 사람 가운데는 목회자의 길이 아닌, 기독 전문인 운동이나 기독 세계관 운동 등에 헌신해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기독 전문인 운동이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운동성이 강한 것입니다. 운동은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일상성입니다. 운동은 특수성입니다. 일상성이 살아난 상태에서 특수성이 같이 살아나야 합니다. 운동과 같은 특수성은 쉬운 것일 수 있습니다. 결과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면에서 일상성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일상성을 바탕으로 특수성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학․ 청년부나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선교 단체는 동질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동질성은 기동성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선교 단체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이질성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기동성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굉장히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운동성을 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오래 기다려 주면서, 하고자 하는 일의 필요성을 계속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에 지쳐 많은 선교 단체 출신의 성도들이 교회를 뛰쳐나가 자기들끼리 모여 교회를 만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패착입니다. 선교 단체 출신들이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뛰쳐나오면 둘 다 망합니다.
저는 13년 동안 내수동 교회를 섬겼습니다. 영국에 잠시 가 있다가 귀국 후 다시 내수동 교회로 가길 원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제자들교회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몸이 고르게 자라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습니다. 특수성을 기반으로 했던 여러 단체와 교회의 보편성이 서로 융화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어야 합니다. 영국은 지역 교회는 죽었고, 특수성을 가진 선교 단체는 살아 있습니다. 선교 단체가 교회로 들어가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제는 선교 단체가 교회를 살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로부터의 공급이 끊어지자 선교 단체도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와 선교 단체가 융화되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사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처럼 교육이 문제인 나라는 없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기독교사 운동이 교회를 기반으로 교육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교사운동도 한국 교회의 산물이고, 교회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교회가 선교 단체나 전문인 운동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내수동교회 대학부 사역을 할 때는 선교 단체의 간사나 리더가 되면 교회 사역의 짐을 덜어 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선교 단체에 헌신하도록 하고 주일에만 교회에 헌신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다른 요일에 있는 리더 모임 참석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고민은 새로운 세대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적 고민과 운동, 대형 집회와 당위적 호소에 익숙한 저희 세대와는 달리 지금 세대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대형 집회보다는 작은 그룹의 진솔한 대화를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시대는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외형적으로는 잘 갖추어져 있어도 내면은 너무 공허합니다. 그릇은 잘 준비되어 있는데 채워진 내용이 없습니다. 결국 기본적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만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꺼칠꺼칠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진솔한 나눔도 좋지만 진솔한 나눔에는 답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의 의미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지만 반복되면 같이 가라앉습니다. 진솔한 나눔의 고민은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나눔은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에 기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대형 집회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개체 개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놓고 하나님과 꺼칠꺼칠한 만남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2002 기독교사대회 때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던 교사들은 당시 목사님의 말씀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당시 기독교사대회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요?
2002 기독교사대회는 저에게 굉장히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비가 많이 와서 고속도로가 물에 잠길 지경이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비가 오는데 누가 올까?’ 생각하며 대회 장소인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 도착해 강당에 가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조금 와야 내가 안심하는데 말이죠(웃음). ‘주님 큰일 났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겁나고, 자신 없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단에 서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좋은 교제였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삶 속에서 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겠다는 사람들을 만나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한국 교육의 현실이 척박하고 우리 사회가 교육에 관한 신화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를 일선에서 담당한 교사들이 삶이 참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겠죠.
이번 기독교사대회에 등록한 선생님들에게 주강사로서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말씀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다 보면 똑같은 말씀도 회중에 따라 말씀의 능력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저는 저대로 영적으로 잘 준비해야겠지만, 선생님들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길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듣고자 하는 준비된 마음과 기대가 필요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명저 『설교와 설교자』에서 “설교자는 훈련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설교자로서의 훈련과 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씨름해야 하는 그 영적 노고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그 부르심을 향해 매진하는 삶의 자세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향한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 주기를 사모하는 그 자세가 중요함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화종부 목사님이야말로 로이드 존스가 말한 설교자로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0 기독교사대회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과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주실 말씀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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