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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 '개척자들' 전 대표


송강호 ‘개척자들’ 전 대표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는 평화를 가르쳐야 합니다.

 

인터뷰 및 사진 홍인기

 

봉고차를 타고 도착한 ‘개척자들’의 공동체 집은 낡은 산장을 연상케 합니다. 송강호 전도사님과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무허가 건물이랍니다. 이곳에는 송강호 전도사님 가정과 이형우 대표 가정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 아이를 낳은 가정은 동네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이 집은 국내에 살고 있는 ‘개척자들’ 멤버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집입니다. 송강호 전도사님은 신학을 했지만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개척자들의 대표도 내려놓은 상태라 전도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송강호 대표의 삶과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전도사님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등학교 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 짝이 홍성교회 고등부 회장이었습니다. 친구가 설득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순간에 사람이 확 변하는 것, 깨우침이나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저 개인에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깨우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도 깨우침이라는 논문을 썼고, 유학 시절 하이델베르크에서도 회심이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깨우침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대학에서는 처음에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알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말 상황은 군부 독재 상황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앙은 제가 살아가는 현실과 너무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보다는 교육이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여 신학과에서 기독교 교육학과로 전과를 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졸업 이후에도 대학원에서는 교육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신앙과 교육을 오락가락하면서 살아왔고 그래서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했던 것이지요.

  평화 운동 사역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청소년 감호 처분 시설에서 4개월 정도 살았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길을 잃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청소년 시절 저도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정 지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판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 분들은 제가 청소년을 선도하는 방법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이 생기게 되었고, 더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그곳에서 나와 학교를 못 가고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을 위한 안내자가 되기 위해 용산 전자 상가에 작은 사무실을 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친구이자 배움의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당시 용산역 앞에는 학원가가 있었고 전자 상가 주변에는 컴퓨터 조립에 미친 아이들이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데이콤의 PC 통신에서 ‘자유 학교’라는 이름으로 동호회를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접속할 수 있는 사람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주변의 도움 없이 일을 하다 보니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고 저녁에는 교육 정보를 알려 주는 사무실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재정 압박이 심해졌고 운영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용산 보광중앙교회에다 이 일을 뒷받침해 주면 전도사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교회는 제게 청년 사역을 맡겼고 저는 청년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청년부에서 '개척자들'을 공동으로 창립한 이형우 현 대표와 말레이시아 국제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광일 형제 등을 만났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만난 청년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해야 더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교회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라 인류가 겪고 있는 현실로부터 교회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려 한 것이지요. 저희는 사람들이 겪는 심각한 고통의 현장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전쟁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인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은 전쟁과 기아입니다. 기아조차도 대부분 내란과 내전과 같은 분쟁 사태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분쟁이야말로 인류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저와 청년들은 분쟁 지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는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1993년 9월 유학을 가면서 전쟁이 나면 상황들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전쟁터에 가 보자고 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허튼 약속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1994년 초 1년도 안 되어 한참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하던 무렵 반갑지 않은 연락이 왔습니다. 아프리카 루안다에서 전쟁이 터졌으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냐는 연락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포기하면서라도 청년들과 함께 한 약속을 지킬 것인가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아주 간단한 답이 떠오르더라고요. 약속은 약속이다. 약속은 지켜야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지요. 장학금을 전해 주는 독일 개신교 총회에 전쟁 지역에 가기 위해 학업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하니 '잘 가'라는 짧은 답신이 왔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받고 이게 아프리카로 가라는 말인지 한국으로 돌아 가라는 말인지 아리송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르완다로 가기 위해 독일까지 저를 찾아온 세 명의 청년들과 아프리카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 비행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전으로 이미 공항들이 폐쇄되어 비행기로는 르완다에 입국할 수가 없어서 인접한 부룬디로 가게 되었습니다.

르완다 내전 초기에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대량으로 학살하여 후투족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러나 제가 도착한 1994년 6월에는 이미 투치족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르완다 내전은 브룬디 독립 기념일을 전후해서 브룬디로도 번졌습니다. 그래서 브룬디와 르완다 사이의 국경이 폐쇄되었고 저는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의 까라그외(Karagwe) 난민 캠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국경을 이루는 카게라(Kagera)강을 건너 도망쳐 나온 5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임시 천막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UN은 최소한의 식량인 콩과 옥수수, 기름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이 3~4킬로미터 떨어진 흙탕물에서 물을 길어와 끼니를 준비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먼 곳까지 걸어가서 물을 길어 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단하고 피곤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실상 아이들은 밤마다 불도 지피지 못한 채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넓은 분지가 울릴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름답고 박진감 넘치는 그 노래 소리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 한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나라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어른들이 소리를 메기면 어린이들은 박진감 넘치는 엇박자의 받아치는 소리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내용의 노래를 부르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른들이 “투치족의 눈을 뽑아”, "투치 족의 귀를 잘라", "투치족의 코를 베어"라고 번갈아 가며 소리를 메기면 아이들은 그 때마다 “잘근잘근 씹어 먹세”라는 후렴구로 화답하는 살벌한 노래였습니다. 저는 난민촌에는 학교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프리카 식의 구전으로 가르치는 증오와 복수의 학교가 밤마다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난민촌에서는 시간이 멎어 있거나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난민촌에서 저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런 난민촌에다가 천막을 치고 이들의 전쟁에 책임이 있는 여러 나라의 청년들을 모아 미움과 복수를 배우는 난민촌의 어린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쳐야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언덕 위에서 종을 울리며 그 지칠 줄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얘들아, 너희들을 위해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다"라고 외치면 수많은 아이들이 언덕 위의 천막 학교로 막 뛰어올라 올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이 꿈을 6년 동안 가슴에 품고 키워 오다가 2000년에 이르러서야 독립 투쟁으로 고통스런 분쟁의 상처를 입은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살아가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모아 처음으로 천막을 치고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평화 학교가 올해로 12년째를 맞이합니다. 저희 '개척자들'은 여름마다 분쟁 당사국들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청년들을 불러 모아 분쟁을 겪었던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캐시미르 등지에서 평화 학교를 열어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화해와 상생을 위한 희망을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어떤 단체든 단체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있기 마련인데요. ‘개척자들’에는 어떤 기폭제가 있었나요?

두 번의 중요한 기폭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기점은 1993년 초에 청년들과 세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을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해 9월에 유학을 떠났는데 1998년 12월에 돌아올 때까지 저 없이도 청년들 스스로 그 기도 모임을 지속하는 것을 보고 '이 기도 모임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기도 모임은 세계를 위한 기도라는 이름으로 근 20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 '개척자들'은 이 기도 모임을 통해 잉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World Christian Frontiers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The Frontiers로 이름을 다시 정했고 한국에서는 '개척자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자니 학교나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들의 기도 모임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습니다. 이 기도 모임이 내 직장이라고 생각하니 벌어먹을 일이 막막했고 가족들도 당황해 했지만 하나님이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거지가 되자.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하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매일 되뇌이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두 번째 기폭점은 기도 모임이 청년들을 분쟁 지역으로 파견하는 단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1999년 들어 가난이 몰려왔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저희 가정이 불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혼 위기까지 치달았습니다. 저는 궁여지책으로 대구의 영남신학대학에서 매주 이틀 강의를 하며 청년 신학생들에게 평화를 위한 헌신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연이 되어 평화를 위해 1년 동안 함께 봉사하겠다는 6명의 신학생들을 만나 양평 산골에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꾸준히 기도 모임을 해 왔던 보광교회 청년들과 새롭게 동참하게 된 영남신학대 청년들이 함께 모여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만들 청년들을 파견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24인용 군용 천막을 치고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 너무 추워지자 더 깊은 숲 속의 짓다 만 건물을 헐값으로 임대해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전기도 없고 물도 안 나오는 집 모양만 있는 큰 건물에서 한 겨울에는 눈 덮힌 산의 나무를 잘라 난로를 때고 얼음을 깨어 설거지를 해야 하는 녹녹치 않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의 청년들이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분쟁 지역에 청년들을 파송하기 위해 훈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아는데, 어떤 훈련인가요?

저희는 분쟁 지역에서 평화 캠프를 개최합니다. 훈련은 한국과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진행됩니다. 한국에서는 1월이나 2월 그리고 7월에 평화 사역자 기초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보통 2주 정도 진행합니다. 평화 교육이나 평화 감수성 훈련, 타 문화, 타 종교에 대한 이해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활동을 해야 하는 분쟁 지역이 워낙 열악한 상황인지라 준비 훈련으로 약식의 철인 3종 경기 대회도 훈련에 들어 있습니다. 10킬로미터를 뛰고, 23~24킬로미터의 자전거 타기, 남한강을 수영으로 왕복하기 등을 해야 합니다. 또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지에서 등산도 하고 노숙도 합니다. 분쟁 지역에서는 모든 시설이 마비되고 파괴되어 있습니다. 물도 멀리 가서 떠 와야 합니다. 저희 단체는 봉사 참여자들에게 현지에 들어가서 현지인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도록 요청합니다. 때론 배고프고, 덮고, 추우며, 땅바닥에 비닐을 깔고 자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온갖 벌레나 빈대, 벼룩에게 물리기도 합니다. 자다가 천장에서 얼굴 위로 쥐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화장지는 물론이고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고단한 생활로 인해 평화를 만들겠다고 찾아간 마을에서 봉사자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너희들만 평화로우면 우리 마을이 평화로워지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 훈련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희 '개척자들'은 흔히 국제적인 단체들이 그러하듯이 경호원이 지키는 안전한 지역 안에서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희의 안전을 걱정합니다. 저희는 주민들의 지역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서 현지인들이 우리들의 안전망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평화 활동을 하려고 한다면 현지 사람을 통해 자신들의 안전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하게 피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함께 살던 현지인들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피신하는 방식을 따라 현지인들과 함께 피난을 했습니다.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평화를 절대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무엇일까요?

저는 한마디로 하면 원래 있었던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회복시키는 것이 평화입니다.

포괄적인 평화의 개념을 우리의 사역에 모두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현재는 분쟁 지역이나 재난 지역의 구호 활동으로 우리의 사역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재난 지역의 구호 활동을 사역으로 넣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분쟁 지역 자체가 곧 재난 상황이라서 자연 재난 상황에서도 우리의 경험이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우리 안에 논란이 많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데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해 합의하게 된 것이지요.

분쟁 지역에서 저희가 어떤 평화 활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면 저희가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분쟁이 그친다고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살얼음 같은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그 얇은 얼음장 아래에는 원한과 분노, 폭력과 보복이 준비됩니다. 이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복수의 사슬을 끊는 평화 교육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는 평화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 광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너무 자주 분쟁이 종교심과 애국심이 온순한 사람들을 광기 어린 폭도로 만듭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 평화 사역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1999년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 투표로 인해 심한 갈등과 분쟁을 겪었던 동티모르에서 살인을 하거나 이웃집에 방화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어 국경을 넘어가 난민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미 인도네시아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개척자들'은 이렇게 난민이 된 사람들에게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을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본래의 정체성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사를 비디오로 촬영해서 국경 너머의 가족에게 보여 주고 다시 가족들의 인사를 촬영해 난민촌으로 가져와 그 난민 가족들에게 보여 줍니다. 저는 비록 돈이나 물질로 돕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활동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저는 이런 과정 속에서 평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평화 교육과 관련하여 학교 교육의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학교에서 평화 교육을 어떻게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광명의 가림중학교나 저희가 살고 있는 국수리 지역의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평화 교육을 시행한 적도 있습니다만 평화는 교실보다는 교실 밖에서 더 잘 가르쳐질 것 같습니다. 보스니아에서 1998년 전쟁이 났을 때 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방문했는데 저는 그곳이 평화에 대한 갈망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학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살과 파괴, 어린 아이들이 지뢰로 다리가 잘린 그 현장이 인류에게 있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모스타라는 도시에 갔을 때 집집마다 대문 앞에는 전쟁 중에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는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잠을 자다가 저의 딸아이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밤새 딸아이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찾아다니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나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하룻밤의 악몽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평화 교육은 의학 교육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과 대학 병원에 가면 교수는 학생들을 병고를 겪고 있는 환자 곁에 둘러 세우고 질병과 치료법을 가르칩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입니다. 스스로도 고통스럽고 자신의 아픈 부위를 감추고 안 보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의료 교육이 환자에게 부담스러운 것처럼 평화 교육도 비슷합니다. 한편으로는 분쟁 지역에 외부인들이 들어온다는 것이 현지인에게 부담이 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현지 주민들은 때로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깊이 감춘 분노와 수치심들을 다시 토해 내는 것이 괴로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정신적인 외상을 치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겠다는 의지와 감수성이 이런 분쟁의 폐허 속에서 생깁니다.

저는 모든 청년들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최소한 2년 정도 자발적인 봉사를 하도록 권유합니다. '개척자들'은 이를 평화 복무라고 합니다. 저는 군 복무보다 이 평화 복무가 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만든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종교와 관련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물론 여자들에게도 말입니다. 여자들이 군 복무에 징집 면제되는 것은 사실 일종의 성 차별인데 이에 대해 항의하는 여자가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젖을 물려 기르는 여자들이야말로 생래적으로 평화의 유전 인자를 몸에 지닌 사람들이지요. 저는 결코 여성학자는 아니지만 여자들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키고 살상을 일삼는 남자들을 구원할 진정한 평화의 전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기독교 단체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에는 수년 동안 함께 일하는 이슬람 청년도 있습니다. 저희는 신앙심이 없는 일본의 대학생들에게도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평화 활동에 동참하게 합니다. 피스메이커가 되겠다는 생각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분쟁 지역으로 끌어들여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도록 청년들을 선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을 위해서라면 분쟁 현실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학교입니다. 컨트롤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세계의 분쟁 현장을 평화의 학교로 삼아야 합니다. 비록 일반 학교에서 평화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이런 실제적인 현장과 접합되어야 더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와 보니, 하는 일은 무시무시한데 왠지 조직적으로는 어설퍼 보입니다. 펀딩을 어떻게 하나요?

적게 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평화 운동을 하기 위해 터득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입니다. 가난해야 국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 통하려면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능하도록 체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적은 비용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소유로 사는 것이지요. 다 용돈을 받아서 삽니다. 의식주는 공동체를 통해 해결됩니다. 한국에서는 30만 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는 그쪽 지역의 물가를 고려해 5만 원 정도의 용돈을 받습니다. 1년차든 10년차든, 외국인이든 다 똑같이 받습니다.

매달 1,200만 원으로 40명의 식구가 국내외에서 살림을 하고 사역을 합니다. 우리나라에 약 20명의 식구가 살고 있고 외국에 그 나머지 20명이 살고 있습니다. 물론 늘 부족합니다만 돈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 활동가를 발굴하고 길러 내는 일입니다. 재건이나 구호를 위해 돈이 들어온다고 해도 '개척자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구호 자금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조심스럽게 심사숙고합니다. 과연 그 돈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요. 저희 재정의 50%는 교회에서, 40%는 저희 사역에 참여했거나 관심을 갖는 개인들이 후원을 하고 있고, 나머지 10%는 우리가 강의료로 받는 비용이나 우리가 담근 된장 등을 팔아서 보충합니다. 올해는 재정 자립도 20%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구호 활동은 폐해가 너무 커서 가능한 한 꼭 필요한 규모로 제한해서 하려고 합니다. 아이티에서도 구호 활동을 하면서 천만 원을 목표했는데 2천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천만 원밖에 사용하지 못 하고 나머지는 현지 구호 단체에 위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평화 활동과 마찬가지로 구호 활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재난을 겪은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티의 사람들은 엄청난 재난에서 살아남았고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 낸 영웅들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외국의 구호 단체들이 나누어 주는 빵 몇 조각 신발 몇 켤레 때문에 한순간에 비루한 거지로 전락되거나 난폭한 폭도로 변질되는 모습을 쓰라리게 경험했습니다. 구호는 때로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보다 사악한 마음을 증폭시킵니다. 단체들은 구호 활동을 위해 모금을 할 때 가능한 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이려고 영상을 꾸밉니다. 몸의 장애로 인해 몇 킬로미터를 기어 다니며 일하는 어린아이를 불쌍한 어린이로 묘사하기보다는 그의 강인함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존경하고 칭송해야 합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격려하고 치하하는 마음으로 후원을 해야 현지에 있는 사람도 존중받고 후원하는 사람도 시혜자라는 우월감을 벗어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저의 경험은 한국에서는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재난의 피해자들이 실제 현장에서 만나 보니 존경스럽고 위대한 사람들이었으며 내가 그런 사람들의 난민촌에서 그들의 환대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요 소중한 권리라는 자각이었습니다. 현지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러워 할 때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종종 구호 활동은 사람들을 비굴하게 만듭니다. 현장에서 돈을 잘 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모금의 전문가들은 많지만 현장에서 돈을 잘 사용하는 전문가들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선생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부탁합니다.


밥벌이로 하는 목사님, 밥벌이로 선생님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참한 인생이 되는 거지요. 만일 밥벌이로 교사직을 붙들고 있다면 용기를 내서 사직을 하십시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교사나 목사는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슈퍼마켓이나 세탁소의 주인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말 진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의 평생에 제게 진실한 선생님이라고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은 자유가 없는 지옥 같았습니다. 험한 군대 생활보다 더 힘들었으니까요. 때로 경쟁에서 낙오하는 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자살 충동도 느꼈습니다. 여의도고등학교에 다닐 땝니다. 윤리 시간에 형들에게 귀동냥한 이야기를 가지고 월남이 망한 것은 학생들의 시위 때문이 아니라 독재자의 부정과 부패 때문이라고 했다가 교무실에 끌려가 교감 선생님에게 빨갱이 새끼라는 욕을 듣기도 했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 학교의 선생님도 교회 학교 선생님도 목사님도 왜 우리 학생들이 군복 같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를 해야 하는지, 왜 학생이 교정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에게서 열병 분열을 훈련받아야 하고 국민 체조 대신 총을 들고 국군 도수 체조를 해야 하며, 체육 시간에 공 대신 수류탄을 던져야 하는지 이 기막힌 현실을 비판하거나 경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학창 시절이 제 인생의 암흑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스승의 날이 올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갈 존경하는 스승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속을 썩였던 선생님을 무조건 나의 스승으로 인정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야만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는 선생님들이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불사를 만큼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시오. 삶의 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생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사님은 무엇이든 생각하신 대로 행동하시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그냥 자기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 거지요. 너무 계산하지 말아야 그렇게 수 있어요. 옳다고 생각하고 실천한 것이 살다 보면 틀린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습니다. 때는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고 다시 고치는 거지요. 너무 미래를 걱정하고 자기 미래를 조작하려고 들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미래가 불분명하지만 올바른 일이라면 내가 있는 데까지 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 보면 새로운 길들이 열립니다. 그런 불확실함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공동체 식구들과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봉고차를 타고 가서, 200회가 넘는 월요 기도회를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뷰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난달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교육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의 빌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번 겨울에 여러 번 보일러가 얼고, 눈을 치우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눈길을 걸어 출퇴근하느라 아내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늦은 귀가에도 늦도록 잠들지 않고 있다가 맞아 주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개척자들을 만나고 와서 더 이상 저는 불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잠자리에서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우리의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머리로 생각하는 불편함이나 가슴으로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삶으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삶의 단계로 내려와야 하니까요. 하지만, 송 전도사님과 개척자의 식구들을 보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조금만이라 그들의 삶에 다가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