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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광주광역시 교육감 장휘국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1970년 초등 교사로 교단에 선 이후, 30여 년 가까운 세월을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해 광주광역시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전교조 결성과 관련해 해직을 당하기도 했고 전교조광주지부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경쟁의 사막에서 상생의 숲을 발견하다》를 펴낸 바 있다.





광주광역시 교육감 장휘국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교육감이 되겠습니다

인터뷰 및 사진 / 홍 인 기


 교육감 인터뷰는 섭외부터 만남까지 쉽지가 않다. 이번 만남은 교직자선교회 서한철 선생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인터뷰에는 정병오 선생님이 함께했고, 교직자선교회 권상훈 선생님, 서한철 선생님, 홍기춘 선생님, 최두진 선생님이 함께 참석했다. 교육감님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옮기지 못해 많이 아쉽다.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정말 가난하게 자라셨다고요.

 정말 가난했었죠. 집이 너무 가난해 부모님이 아이들을 다 키울 수가 없어서 여동생 둘은 고아원에서 근무하시던 고모님이 데려다 키우셨습니다. 마침 그 고아원이 목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여동생 둘은 그곳에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장성해서 탄자니아와 터키의 선교사로 가 있습니다. 둘째 형님은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당숙 댁에 머물면서 독학 후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셋째 형님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광주서중학교에 막 입학했는데, 분기마다 공납금을 내지 못해 등교 정지를 당했습니다. 등교 정지로 결석 처리가 되어도 학교는 다녔는데 계속 돈을 못 내자 학교에서 집에 가서 돈 가져 오라고 내쫓았습니다. 매 분기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집에다가 학교 안 다니겠다고 했죠. 어머님이 어떻게든 저를 학교에 다니게 하시려고 당고모에게 부탁을 했어요. 그때 당고모부가 경찰 초급 간부셨는데 박봉이셨죠. 그래도 공부 잘하는 놈인데 아깝다고 고숙이 몇 차례 공납금을 내주셔서 겨우 다닐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은 한 번도 가져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바깥에 나가서 수돗물을 마시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봤습니다. 그때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은 광주일고에 많이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가서도 만날 등교 정지를 당하고 자존심을 구길 생각을 하니 그 학교에 가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등록금 안 내도 되는 학교를 찾다가 장학생으로 갈 수 있는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광주고등학교에서는 제가 너무 가난하니까 선생님들이 학교 매점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침에는 학용품을 팔고 점심에는 빵 팔고 그렇게 일해서 번 돈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어떻게 가지게 되셨나요?

 여동생들이 고모 집에서 돌아와서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덕분에 저도 3년 정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머니도 조카들 데려다 키운 고모님의 신앙심에 감동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고요. 교육 대학에서는 CCC 성경 공부도 했는데, 졸업 후에는 교회에 잘 다니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기도원에 가서 1976년 말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동아리 지도를 열심히 하신 걸로 아는데 교직 생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1978년 완도에 있는 노화중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섬에 가 보니 문화적 혜택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해 주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것이었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를 만들어서 성경 연구반 활동을 했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아이들이 전교생 거의 모두였습니다. 기드온협회에 연락해 1,000권의 성경책을 받아 전교생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 가르쳤던 아이들 중 그때 신앙을 가져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아이들 많이 있습니다.

 

완도에서 나온 다음에는 담양여고로 갔습니다. 담양은 광주 인근에 있어서 성적이나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대부분 광주로 빠져나가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만 남는 상황이었어요.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전혀 되지 못하는 아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밤 9시,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시켰어요. 그런데 농번기가 되면 집안에 일손이 부족한 것을 뻔히 아는 아이들은 집안일을 돕지 못해 안타까워 울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학교는 현실을 외면하는 상황이었어요. 저희 반에서 1등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전남대학교에 충분히 합격할 성적이 되었지만 도무지 대학 갈 형편이 되지 않아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일단 시험을 쳐서 합격한 후 그 다음을 생각하자고 설득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학생 1명을 4년제 대학에 합격시키면 승진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제가 아이의 형편보다는 이 승진 가산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담양여고 시절, 담임 반의 두 학생이 신발을 잃어버린 사건으로 서로 오해가 있어 크게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6월이었는데, 담임으로서 3개월 동안 서로 사랑하자며 열심히 지도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자 상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수업을 마치고 학교 앞 냇가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발을 씻겨 주며, “내가 잘못 지도해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더 사랑으로 더 잘하겠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잊고 있었는데 이번 교육감에 출마하면서 책을 한 권 내기로 해서 몇몇 제자들로부터 글을 받았는데, 두 명의 제자가 당시 발을 씻겨 준 사건을 글로 적어 주더군요. 그래서 선거 기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선생님으로 많이 회자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신앙생활과 동시에 교육 구조와 정책의 개혁에 앞장서는 진보적인 교육 운동을 해 오셨는데,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셨습니까?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이 두 가지가 모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담양여고에 근무할 때 제가 역사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교사 수급이 맞지 않다 보니 지리와 사회 문화를 더 많이 가르쳐야 했습니다. 나만 왜 양보를 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생겼지만 제가 신앙 동아리에서 감사하라고 지도해 놓고 제가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각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광주과학고 교사 모집 공고가 났는데 역사 전공에 지리, 사회 문화, 세계사 등 사회 분야를 모두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뽑는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미리 내정되어 있으니 응시하지 말라고 했지만 제가 시험을 통해 합격했습니다. 당시 광주에 있는 학교로 가는 것이 어려웠었는데, 제가 담양여고에서 사회 교과 전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가능했던 것이죠.

 과학고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6월이 되니 교장 선생님이 불러서 수업을 하지 말고 자습을 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과학고 학생들은 고2 말에 과기대 시험을 보는데 사회는 시험 과목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니 수업을 하지 말고 자습을 시키라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사회 지도자가 될 아이들이 역사나 사회 현상에 대한 공부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소신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계속 수업을 했습니다. 과학고에서 실로암이라는 신앙 동아리를 만들어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진짜 사회 지도자는 과학 잘하고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거든요.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었어요. 그래서 제 신앙 소신에 맞게 행동을 한 것이죠.

 그 후로도 저는 제 신앙과 교육자적 양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교장 선생님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일요일에도 공부시키자 했는데 저는 교회에 가고 싶은 아이들은 가게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일요일에 아이들이 교회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변 선생님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장 선생님과 다투고 맞서는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이 일뿐 아니라 다른 일에 있어서도 직원회의 때 벌떡 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다가 전교조 결성으로 1989년에 해직되고 1994년에 복직했습니다. 복직 후에도 학교 내 사안이 생기면 선생님들이 나에게 들고 와서 교장 선생님께 말해 달라, 중심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했고, 저는 의도하지 않은 일에도 앞장을 서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육 운동을 하면서 불의한 제도에 맞서다 보면 의분이 생기고, 그 분노로 인해 자신이 소진되고 영적으로 피폐되기 쉽습니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리며 활동해 오셨나요?

 결국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도 당신 외에는 의지할 때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가족과 아내의 신앙심이 좋습니다.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줍니다. 흔들리고 화가 날 때 신앙으로 가도록 가족들이 도와줍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일 외에도 교육 운동을 포함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이번 교육감 선거 때만 해도 선거 초반 5%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던 제가 당선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저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2009년 여름에 후배들이 낙선하더라도 시민들에게 우리의 정책을 알릴 기회가 된다고 출마를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선거에 패하면 그 책임은 제가 져야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고민을 가지고 교회 여름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수련회에서 목사님이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무렵 개인적으로 역대하를 묵상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은 너희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전쟁의 승리는 군인의 많고 적음에 승리가 있지 않다” 하는 말씀이 자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어려움이 모두 복으로 나타났던 과거의 경험을 다시 기억했습니다.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시민 후보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다들 웃었습니다. 대학 교수, 총장, 국가경영발전위원장을 지냈던 장관급 인사 등의 다른 후보에 비해 저는 교사, 전교조 지부장, 교육 위원의 경력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민 후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합의 추대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제가 정당처럼 경선을 주장했습니다. 시민들 천 명을 모집하기 위해 후보들이 소견 발표를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A4 한 장 반 정도를 준비했는데 저는 A4 9장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선관위가 경선은 안 된다는 결정을 해서 문건을 공람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결국 제가 결정되었습니다. 제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교육 개혁에 앞장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민 후보가 되었고 5%의 지지율을 가졌던 제가 39%의 지지로 교육감에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아침마다 교육감실에서 성경 보고 기도하면서 “저에게 여기를 맡겨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저만 남겨 두시면 안 됩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저는 실수가 많고 용렬한 사람입니다. 제가 교육감이 된 건 기적입니다. 늘 이 방의 주인이 되셔서 결정할 때마다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요즘 교육감님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교과부가 제재를 가하는 일이 많고, 이로 인해 교과부와 교육청의 갈등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제 고사, 교원 평가, 고교 평준화 등과 관련해 교과부와 교육청의 갈등이 있습니다. 일제 고사에 대해서는 법률적 판단이 있습니다. 성취도 평가는 학생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시험 문제는 교육청의 e 진단 시스템을 활용하거나 학교에서 자율 출제 등이 가능합니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원 평가는 자율성을 달라고 교과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과부의 지침을 전면 거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율성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교과부와 협의하려고 합니다. 전국 16개 시․도 교육감들이 매달 협의회와 정보 교환을 합니다. 교과부가 교육감의 권한을 침해하려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육감들이 한목소리를 내었으면 하는데 교육감님들마다 생각이 다르고 잘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교육 관료나 교육 기득권과 싸우다가 이제 교육의 수장이 되셨는데 모든 사람들을 품어서 함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고 지혜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동안에는 전교조 활동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쪽 주장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광주에는 많은 고등학교들이 밤 11시 30분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성적이 오른다고 생각하니까 설득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수업은 6시까지, 1, 2학년 자율 학습은 9시까지, 고3은 10시까지 하는 안을 가지고 내부 토론회와 공청회를 가졌습니다. 일찍 자고 맑은 정신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반대가 많았습니다. 이론은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학관들을 겨우 설득해 공청회를 열었는데 반발이 매우 컸습니다. 결국 수업은 7시까지, 자율 학습 10시까지, 일요일에는 자율 학습 하지 않고, 토요일에는 1~2학년 5시, 3학년 9시나 10시까지 학생들의 동의 아래 실시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학교에서 담임이 자율 학습을 강요했다는 민원이 들어옵니다. 사실이면 시정하도록 조사를 시킵니다. 이에 대해 수긍하고 동의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비리 척결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고도 많이 들어왔고 교육청이 비리 척결을 이야기하자 사법 당국에 신고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사법 당국의 도움으로 많은 비리들이 잠잠하고 있습니다. 학생 인권 조례의 경우도 교권 침해에 대한 장치만 있다면 거부감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주가 지난 5년 동안 전국 수능 성적 1위를 했습니다. 늘 광주의 자랑이었습니다. 금년 연말 수능 성적이 떨어지면 엄청난 비난이 예상됩니다.


좋은교사운동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영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가 28년 동안 교단에 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 7년은 신앙에 대한 지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이후 섬에 가면서 아이들 생활을 보면서 학생들에게 영적인 안정감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 안정감은 삶의 기본입니다. 아이들을 올바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신앙생활의 지도도 필요합니다. 교사 개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학교에 많습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지혜와 힘을 모아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 적극적으로 잘하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