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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대안교육의 대부 송순재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 홈페이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우리 잡지 <좋은교사> 4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국민일보에 싣도록 허락했습니다.

입시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2009.04.07 18:02]      

 
[만나고 싶었습니다]우리나라 대안교육의 대부 송순재 감신대 교수

송순재 교수는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러시아 톨스토이의 자유학교와 덴마크의 자유 교육 운동을 국내에 선구적으로 소개하면서 학교 단위에서 교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 운동이 일어나야 함을 잔잔한 목소리로 전파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대안학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을 향하고 있다. 그가 전파한 교육 사상이 공교육을 변화시키는 목적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올 초 스웨덴 교육 탐방 여정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인터뷰·정병오(좋은교사운동 대표), 김진우(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 / 글·김진우 / 사진·권상한

원래 유럽에서 공부하셨죠?

독일에서 몇 년 지냈습니다. 분위기는 스웨덴과 많이 비슷한데 이곳은 또 나름대로 독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사회적 통합성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가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눈이 들어옵니다. 이를테면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일반계와 실업계를 분리해서 가르치는데, 여기 스웨덴에서는 처음부터 한 울타리에 넣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주 새롭게 다가와요.

우리나라는 직업 과정을 분리하면서 실업계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 되어 버렸는데 독일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제3공화국 때 실업계의 사회적 위상이 꽤 높았지요. 이에 비해 지금은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이 실업계만 잘 되어도 전반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논의의 초점이 일반계에 맞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강남권을 중심으로 말이지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게 우리나라 교육의 모든 걸 대표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 실업계 학교 교육은 근래까지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어 왔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실업계 학생들이 적지 않은 부분에서 낙오자로 평가받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독일에서도 그 존재 의의가 있느냐 하는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전통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수공업과 제조업 분야의 튼실한 구조와 내용은 세계적으로 널리 평판이 있는 것이고, 또 오늘날의 그러한 성공은 실업 교육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업 교육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중요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실업 교육의 전통적인 강점을 살리면서(이 제도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제도로 평가받고 있음) 근자에 드러난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기 위한 노력들이 많이 기울여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중등 교육 단계 1(대충 우리나라의 중학교에 해당)까지 계열을 구분하지 않고 한 울타리에 넣어서 가르치는 종합 학교 같은 형태가 그런 거지요.

‘아름다운학교운동’을 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학교운동’이라고 하지는 않고 ‘학교를 단위로 한 변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하에 <학교교육연구회>라는 모임을 매해 가져 오고 있습니다. 금년으로 8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는 입시 제도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입시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그런데 정말 그런 거냐 하는 겁니다. 입시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아이들이 인간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없는가? 학교의 어떤 공간을 교육학적으로 잘 꾸밀 수 없는 건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입시 제도 문제란 실상 문제의 어떤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걸 해 보자는 거지요. 그런 걸 잘하게 되면 지금 거론되는 그런 문제들도 많이 극복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대안교육 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그 맥락에서 대안교육을 연구하기 위한 ‘교육사랑방’이라는 교사 연구 모임이 시작됐지요. 그런 관심사에서 <처음처럼>이라는 저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모토는 우리나라 교육은 전반적으로 철저히 대안적인 전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사회적 반향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학교 운동은 그러한 관심사를 공유합니다. 학교 변화에 관한 문제의식은 개인적으로는 물론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운동으로 펼치게 된 데는 대안교육 운동이 결정적 작용을 한 셈입니다.

당시 가장 큰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었죠?

“학교가 변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회가 교육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학부모들이 이러면 안 된다. 국가도 이러면 안 되고,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회 전반에서 교육에 대해 철저히 다른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공교육의 변화가 필요하고 또 다른 형태의 학교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대안학교 형태로 나타난 셈이지요. 그런데 공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별로 주목을 못 받고 대안학교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지요. 여기 언론이 한몫을 했습니다. 당시 논의가 분분했는데 학교를 만들려면 좀 찬찬히 생각하면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대안학교의 좋은 면만 부각했지, 문제점이나 부정적인 면은 잘 드러내지 못했어요. 그런가 하면 공교육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도 늘 제기되어 왔지요.

이즈음 한 가지 인상적인 운동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말 러시아가 국가적 모라토리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유럽 <자유교육협회>의 몇몇 선생님들이 러시아의 교사들과 결합해서 시작한 “아름다운학교운동”(Beautiful School Movement)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학교의 변화를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죠. 학교 교육의 목표를 아름다움에 두고, 학교 공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든지, 교육의 내용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이것을 확산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저로서는 관심이 없을 수 없어 바슈꼬르또스탄 공화국의 ‘우파’라는 도시에 가서 그 행사에 참석했어요. 그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죠. 특히 톨스토이의 ‘자유 교육’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 소설가로서만 알려져 있던 이 세계적인 대 문호가 현대 대안교육 운동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몰랐었는데 이런 만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때 러시아 교육의 저력을 느꼈어요. 하나의 중요한 자극이 되었지요.

러시아 교육의 저력이라 하면 어떤 것을 말하시나요?

러시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교육 내용이 아주 견실하고,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도 학교에 올 때 아주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온다는 거예요. 지금도 아이들은 돈이 있건 없건 학교에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와요. 사제지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살아 있고, 예술 활동도 강조하여 진작시키고 있지요. 그리고 학교가 아름다워요. 서방의 학교에 비해 러시아 학교들은 시설이 낡고 재정도 열악하지만 그래도 교실 내부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해요. 학교 공간을 교육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손이 많이 가 있어요.

그 뿌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제정 러시아 때 톨스토이가 자유 교육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영향은 컸습니다. 톨스토이 말고도 몇몇 매우 고상한 교육 사상을 가진 교육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집권한 공산당 정부가 톨스토이의 교육 사상을 도입했지요.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1930년대 마까렌꼬라고 하는 공산주의 교육학자가 나타나서 자유 교육을 폐기하고 ‘집단 교육학’을 도입하죠. 그 이래로 집단 교육학이 자리를 잡아왔어요. 공산주의 교육이 나름대로 가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성이나 개인의 삶을 촉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영성적 차원을 배제하는 것도 역시 큰 문제죠. 하지만 공동체적으로 평등한 사회로 만들려고 하는 이념적 열정은 대단하지요. 모스크바나 베쩨르부르그 같은 대도시의 학교들은 대체로 좋은 수준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전역에서 소도시나 농촌 학교들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매우 열악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톨스토이 자유 교육 운동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제정 러시아가 내세운 교육은 국가주의적이고 산업화라는 목표에 많이 오염이 되어 있었어요. 아이 개개인의 품성에 기초한 교육이 아니라는 겁니다. 톨스토이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루소에요. 루소의 어린이의 자유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교육관과 진보적 사회관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계층의 진보, 엘리트 계층뿐 아니라 노동자, 농부, 서민들 삶의 정당한 진보를 추구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정부가 톨스토이 교육을 채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톨스토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교육 사상에는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 요소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이해한 신앙이었습니다. 간디에게 영향을 끼치고, 유영모나 함석헌 선생께도 영향을 끼쳤던 사상이지요. 함석헌 선생도 교육에는 하나님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형태는 아니라고 했어요.

저는 요즘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 대안학교들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것이 과연 기독교 사상적으로 얼마나 천착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돼요. 어떤 기독교 대안학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실은 좀 놀랐어요. 대안교육 운동의 기본적 지향성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왜 그렇게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는가, 왜 그렇게 영어를 강조하는가 등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해 봅니다. 또 현재의 기독교 대안학교들이 왕왕 신학적으로 교리주의적 독단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교육학적으로는 얼마나 천착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톨스토이도 주류 사회와 교회의 교리적 접근에 대해선 굉장히 비판적이었어요. 그래서 당시의 정부와 귀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지요.

톨스토이 생전에 러시아에서도 학교 설립과 같은 운동이 일어났습니까?

톨스토이는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야스나야 빨랴나라는 자기 영지를 개방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반영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서민과 농부, 노동자 아이들을 데려다가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황실과 귀족들의 미움을 사 결국에는 문을 닫게 되지요. <야스나야 빨랴나>라는 이름의 저널도 만들어서 사회 개혁의 이념과 학교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폈지요. 톨스토이의 문제 제기에 앞서 같은 방향에서 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 등을 위시하여 바제도우나 잘츠만 같은 박애주의자들이지요.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계몽주의라는 정신적 맥을 타고 전개되어 온 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를 통해서 왕정 체제나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전통적 교회의 종교적 성격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일어나지요. 그런 정신적 노선의 연장선에서 톨스토이가 근대기에 이 사상을 다시금 발화시킨 셈이지요. 그게 1850년대니까, 서방보다는 40년 정도 앞선 거지요. 서구 사회에서는 덴마크를 제외하면 1890년대 정도를 기점으로 삼습니다.

서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러시아의 경우와 비견될 만한 사례는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에서는 1800년대 초엽에서 중엽 사이에 그룬트비(N.F.S. Grundtvig)라는 분이 자유 교육 사상을 제기했지요. 그는 당시 덴마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목회자이자 신학자요, 시인이자 사회 개혁자로서 이런 방향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룬트비가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청소년과 청년, 시민들을 교육적으로 계몽하고 시민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를 위해 그는 당시 국가가 도입했던 교육과는 다른 자유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그 사상적 배경으로는 계몽주의, 낭만주의, 민족주의 같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독일 개신교였는데 그는 그걸 그냥 답습하지 않고 많은 논쟁을 했지요. 덴마크 기독교 신앙은 덴마크인의 심정으로 이해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근대기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되 조선인의 심정으로 이해된 기독교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룬트비도 독일에서 들어온 개신교를 덴마크의 정신과 역사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민족주의적으로 각인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바탕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덴마크 국민들 특히 농민들을 근대적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계몽하고자 했지요. 그래서 세워진 것이 기숙형 ‘시민대학’(folk high school)입니다. 이 사상은 후에 콜(K. Kold)이라는 동역자를 통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데, 콜은 1850년대 초엽에 시민대학과 ‘프리스쿨’(free school - friskole)을 세워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 학교 운동은 이후 이삼십 년 동안 열화 같이 확산되었고 그 여파는 다른 이웃 국가들로 전해지게 되지요. 제가 아는 한 현대 북유럽의 자유 교육 운동의 한 가지 모태는 기독교 신앙이에요. 콜은 신앙의 주체적 체험과 자유를 강조한 경건주의 신앙 운동의 영향권 하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콜은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성격을 갖기 때문에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유 교육이어야 하고, 방법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상을 펼쳤습니다. 이 운동은 중부와 남부 유럽에서보다 40년 정도 빠르게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이 사상은 상당히 융성했었는데 히틀러 때문에 다 무너져 버렸죠. 그걸 다시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요. 이에 비해서 덴마크에서 이러한 역사는 150년 이상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요.

북유럽은 공교육 혁신 운동인데,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기독교 학교 운동들이 주로 사립학교 운동이 되는 것에 비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공교육은 근대 국가가 국민들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쓴 것 같은데요.

덴마크의 경우, 자유학교는 사립학교이고 전체 학령 아동 중 13%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유학교들은 공교육 체제에 대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자유학교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렇게 보아도 무방합니다. 공립학교들이 그러한 자유학교의 성과로부터 배우려는 분위기도 있어 왔습니다. 유럽의 공교육 체제가 가지는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교육은 한 사회와 국가의 요청과 필요에 의해서 설립되는 제도로, 유럽에서 처음 도입될 때는 국가의 시각에서 설정된 객관적 성격이 강했지만(즉 지역이나 아동 개인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는 구조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발전 과정에서 점차 개인과 삶에 대한 배려의 폭을 끊임없이 넓혀 오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자유 교육 운동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곳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경우 국가적 교육과정에도 불구하고 단위 학교에서 가지는 자유의 폭이 넓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이 나라에서 초중등 교육 구조는 평준화되어 있어서 단위 학교나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교육과정 편성에 관한 법에 따르면 단위 학교는 마음만 먹으면 상당한 폭에서 자유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들 국가에서는 종교를 공교육 구조 내에서 주요 학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도 아동의 자유를 고려해서 그 내용과 방법을 부단히 쇄신해 가고 있는데, 이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는 미국 공교육의 제 양상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는 저희 같이 공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미국이나 네덜란드 같이 공교육은 국가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없다고 보고 기독교 학교를 세우거나 홈스쿨을 하는 흐름도 있지요. 이런 흐름들을 어떻게 조화해서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기독교인으로서 공교육에 대한 책임과 종립학교 교육을 할 책임은 모두 인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국가라는 두 영역에서 살게 하셨어요. 그래서 루터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라고 했지요. 국가가 겉으로 봐서는 왕이 통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에 국가에서 정치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단 그 기독교적 성격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공교육 체제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회나 종립학교에서처럼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곳에서 소통이 가능한 논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국가에는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와 경제 체제와 종파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곳에서는 소위 전통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교육적 논법이 아닌 또 다른 논법을 필요로 합니다.

후자의 경우, 국가 공교육 체제 말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한 그런 형태의 사립학교도 요청됩니다. 현재 평준화 체제 하의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들도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혹자는 평준화 때문에 너무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실상 그렇지요. 하지만 접근하기에 따라 그 가능성은 여전히 많고 열려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미션스쿨들의 접근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다른 발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미션스쿨들이 떠오르는군요. 여하튼 우리는 그런 기독교계 종립학교들을 통해서 국가 공교육 체제와 논쟁을 벌일 필요도 있습니다. 교육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종교에 대한 입장에 대해 말이지요. 네덜란드의 경우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경건주의 사상에 의해 세워진 전통적 종립학교들은 쇠퇴 일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컨대 그 곳에는 경건주의 신학은 살아 있지만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교육적 접근에는 결함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담겨 있지만 거기에 오늘날의 교육적 상황과 교육학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교육학을 가능케 하는 은총의 근원이시지요. 근대 교육학이 발견한 것은 바로 어린이라는 존재입니다. 근대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발견한 것과 같지요. 성서를 보는 창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성경을 어른 중심으로 읽었는데 근대 교육학은 어린이의 관점에서 성경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인식하고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키울 것인가를 고민한 사람이죠. 루소와 달리, 페스탈로치나 프뢰벨은 철저히 기독교적인 사상가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그룬트비도 그렇고요. 이들은 기독교 사상으로 가르치되 전혀 다르게, 즉 아동의 자유를 고려하여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경건주의에 입각한 자유 교육 사상은 계속해서 생명력을 가지고 현대적인 사상과 교류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지요.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학교들에는 그런 교육학이 부족하다는 것이 제 인상입니다. 아울러 ‘어린이 신학’, ‘청소년 신학’ 같은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학교 교육을 살리고자 하는 기독교사 운동인 좋은교사운동이 보완할 점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이를 발견한,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그런 기독교 교육적 시각과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적 현실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들어갈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성이란 또 다른 논법을 필요로 하는 장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지만 한 사회에서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그런 작업 말이지요. 그렇지 않고 그건 세상에 속한 영역이라고 등을 돌리게 되면 아마도 상황은 좀 더 어렵게 전개될 것이 뻔합니다. 국민의 신분도 가질 필요도 없고 여권도 반환하고 교회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거죠. 교회와 국가는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국가에서는 다른 논법이 통용되지요. 기독교 학교의 논법을 가지고 공교육 전체의 논법과 소통할 수는 없지요. 이 대목에서는 이를테면 페스탈로치나 그룬트비가 도움이 되겠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기독교 교육을 했지만 그가 사회 개혁을 위해 기울인 다양한 노력과 그 성과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룬트비는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시민대학을 설파했고, 결국 덴마크 사회는 계몽된 시민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니면 풀무학교를 보지요. 기독교 신앙 위에서 아울러 그룬트비나 페스탈로지와 같은 노선에서,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에 토착화된 학교입니다. 지역과 결합하여 생태적 삶과 생태적 교육을 구현해 낸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운 소산이지요. 저는 감리교니까 웨슬리적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의 감리교회 신앙적 성격과 전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웨슬리를 통해 온 기독교 신앙을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살아오면서 경험한 정서에 따라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교육도 마찬가지로 우리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지요.

송순재 교수는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교육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음. 1991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 교육 전문지 <처음처럼>의 공동 책임 편집인, <삶과 교육을 위한 대화와 실천 모임> 공동 대표. 저·역서 『유럽의 아름다운 학교와 교육 개혁 운동』(내일을 여는 책, 2000),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내일을 여는 책, 2001), 『프레네 교육학에 기초한 학교 만들기』(내일을 여는 책, 2002), 『느낌이 있는 학교건축』(내일을 여는 책, 2005), 『대학입시와 교육제도의 스펙트럼』(학지사, 200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