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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차인표 : 애통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것은 약속이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것은 약속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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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진우  |  사진 조은하

차인표 : 배우. 1967년 서울 출생. 뉴저지 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해운 회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1993년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 영화 <크로싱>에서 뜨거운 부성애 연기를 펼치며 북한 동포와 탈북자가 처한 고통스런 현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연기뿐만 아니라 입양과 봉사 활동, 그리고 기부를 통한 나눔으로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구호 및 양육 단체 ‘컴패션(Compassion)’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컴패션 밴드’를 조직하여 결연과 나눔의 삶으로 초청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차인표 씨를 인터뷰 한 날은 3월 25일. 그가 쓴 소설 <잘가요 언덕> (위안부로 끌려간 이후 반세기 넘는 세월이 지나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훈 할머니’의 사연을 TV 뉴스로 알게 된 차인표 씨가 1997년부터 10여 년간 쓴 소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평화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보여 주며, 아직 치유되지 않은 민족사의 상처를 다독인다. 차인표 씨는 백두산 현지 답사와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이 출간되는 날이었다. 탤런트가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도 화제가 되지만, 우리가 차인표 씨를 만나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가 걸어온 행보에서 좋은교사운동과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컴패션 홍보 대사로 열정적인 활동을 통해 연예인의 사회 봉사 활동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입양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데 이는 좋은교사운동이 추구하는 가정 방문과 일대일 결연의 정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남들이 시키지 않는 일을 자청해서 하는 것일까?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학창 시절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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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이 삼형제예요. 위로 두 살 많은 형과 아래로 세 살 적은 동생이 있어요. 그런데 형이랑 동생은 공부를 굉장히 잘했어요. 둘 다 전교 1등이고, 형은 학력 고사에서 전국 2등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완전 보통 학생이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형이 다니던 충암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선생님들의 기대가 엄청 컸죠. 그런데 저는 반에서 20등쯤 했던 것 같아요. 중간은 했는데, 형들에 비하면 아주 못하는 게 되는 거죠.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님들도 형과 저를 비교해서 "형은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이렇게 한마디 하실 법도 한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셨어요.
중학교 때 생각이 나는데요. 제가 연서중학교에 다닐 때 민주화 바람이 불어서 반장을 선거로 뽑게 되었어요.―그 전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선생님이 지목해서 뽑는 분위기였지요.―그래서 선거를 했는데, 제가 딱 뽑힌 거예요. 제 생각에는 아이들이 약간의 반발심 비슷한 마음으로 저를 뽑아 놓고 선생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담임 선생님이 공업 선생님이셨는데 저를 부르시더니 “너 반장을 꼭 해야 되겠니?”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어~, 기왕 뽑힌 거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죠. 제 생각에도 그때 선생님께서 아마 굉장히 난감하셨을 텐데 저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열심히 하라고 하시며 그 이후로 한 번도 핀잔을 주지 않으시고 끝까지 격려해 주셨어요.

이번에 <잘가요 언덕> 후기를 보니까 어머니께서 일일이 피드백을 주신 것 같던데, 어머니의 영향이 크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을 하셨어요. 1980년대에는 이혼을 하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관계가 끊기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리고 신학교에 가셨는데 여성 목사 안수를 안 해 준다고 해서 미국으로 가게 됐어요. 거기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역시 한국에 오니 영어 강사밖에 할 게 없더라고요. 지금은 그만 두시고 농사를 짓고 계신데요. 덕분에 한 15년 동안 어머니께서 키우신 것들로 먹고 살았죠.
저는 어머니가 살아 내신 삶을 쭉 보면서 뭐라고 할까요, 저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평소에 저와 대화를 많이 하시고요. 이번에 <잘가요 언덕>을 쓸 때도 가장 깐깐한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 주셨고, 식물 이름이나 배경 등에서 틀린 부분을 많이 짚어 주셨죠.

어머니는 아들이 탤런트를 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를 응원하셨어요.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뉴욕의 해운 회사에 다닐 때, 어머니께서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그런데, 저와 몇 시간 대화를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인표야. 지금 몇 시간 동안 대화하는 사이에 네가 꺼내는 소재는 거의 대부분 '돈'이구나. 그런데 만약 돈이 아니라 다른 꿈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원래 제 꿈은 배우였거든요. 어머니가 그 말씀을 하신 거예요.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돈 잘 벌고 잘 살고 있는데 그렇게 얘기하기가 쉽지 않죠.
어머니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다음 날로 사표를 던지고 한국으로 왔어요. 아무런 기약 없이…. 그렇게 와서 여러 방송사 탤런트 시험에 떨어지고 하다가 다행히 MBC 공채에 붙어서 시작하게 됐어요.

삶에 터닝 포인트가 있으신가요?

원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교회에 회의가 생겼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교회를 안 나가다가, 결혼을 하고는 교회만 다니는 식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갈급한 마음이 생겼어요.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지만 편안해진 것과 반비례로 갈급함이 생겼어요. 나중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JESUS 라는 뮤지컬에 예수 역할로 4년 동안 무료로 출연하여 공연을 했어요. 그걸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했는데 아무런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3년 전에 제가 마흔 살 되던 해에 아내가 활동하는 컴패션이라는 단체의 홍보 대사가 되었어요. 한번은 아내가 컴패션 활동으로 인도에 가야 하는데,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제가 대타로 갔어요. 저는 그 일에 별로 관심도 없고 내키지도 않아서 억지로 갔어요. 그래서 같이 가는 분들과 섞이기도 싫어서 혼자만 일등석을 타고 갔어요. 가장 가난한 나라에 봉사 활동을 가면서 일등석을 타고 가는 것이 제 모습이었죠.
인도에 도착해서도 '이번으로 끝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컴패션 대표이신 서정인 목사님께서 이렇게 부탁하시더군요.
“차인표 씨, 저 아이들은 진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애들이에요. 태어나서 평생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을 만나면 사랑한다, 얼마나 힘들었니? 이렇게 위로하고 껴안아 주십시오.”
그것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갔죠. 아이들이 시골 교회에 쭉 서 있는데 제가 가서 맨 첫 줄에 있는 아이 손을 잡았죠. 그런데 그 순간에 40년 동안 못 만났던 예수님이 제 마음에 폭포수 같이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인표야, 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너 사랑한단다. 내가 위로해 줄게. 고생했어.”
내가 그 아이한테 해 주려고 했던 말씀을 그렇게 폭포수 같이 들려주시더라고요. 그 순간에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 이후로 3년 동안 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가치관이 바뀌고 관심사가 달라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엉뚱한 데서 예수님을 찾아다녔구나 싶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가며 예수 역할을 하며 수천 명 앞에서 예수를 찾았고, 일등석 속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예수님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제일 힘없고, 보잘것없고, 약한 아이 앞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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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패션 밴드 활동은 어떻게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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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후에 제가 연예인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한국의 잠재적 후원자들 앞에서 공연을 해서 결연이 많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아내는 하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오늘자로 멤버 수가 100명이 되었어요. 연예인이 40% 정도 되고요. 다 자기 발로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벌써 100회 가까이 공연을 했어요.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결연이 늘어요. 그 때마다 몇 백 명의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옮겨지는 거예요. 3년 전에 우리나라의 컴패션 결연 숫자가 3,000명 정도였는데 지금 66,000명으로 늘었어요.

두 아이를 입양하셨는데, 입양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습니까?

원래 아내와 결혼할 때 입양을 하기로 약속을 했어요. 시간이 좀 걸려서 약속을 지키게 된 거죠.
입양할 때 입양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면 수백 가지도 넘거든요. 그것에 대해 인간의 머리로 어떻게 해결할지를 생각하면 대항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생명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그저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거죠. 그런 배짱은 100%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그리고 입양과 관련하여 오해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입양을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니까 입양하는 거예요.

<크로싱>이라든가 이번에 출간한 <잘가요 언덕>과 같은 경우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 배우로써 가지는 부담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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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봤을 때는 하다못해 길거리의 돌멩이 하나도 좌우와 연결할 수 있다고 봐요. 어쨌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40대 가장으로서 대중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당연히 제가 할 의무라고 생각해요.
<크로싱>은 정치적 진술이 아니라 탈북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것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고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잘가요 언덕>의 경우에 1930년대에 우리나라가 정말 형편없던 시절에 할머니들이 겪었던 고통과 꿈과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크로싱>도 그렇고 <잘가요 언덕>도 그렇고 기본적인 동기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인 것 같아요. 애통하는 마음. 저는 탈북자들이 처한 현실을 보면서 진짜 마음속으로 끊어지게 애통함을 느꼈거든요. 소설을 쓰면서도 이 할머니들이 소녀 때 느꼈을 그런 고통, 두려움, 말도 안 되는 황당함,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이역만리 동남아 어디에 와서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약한 나라의 힘없는 소녀들을 짓밟는 그런 현장의 피해자가 되어 있는 것을 상상하는 순간 가슴이 턱 막혔어요. 지금은 다들 돌아가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건데, 그 슬픔이 애통함으로 왔어요.
누군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봐요. 순간적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애통해 하는 마음을 품는 그 순간에 그것은 ‘약속’이라고 생각해요. <잘가요 언덕>은 그런 저 자신에 대한 약속의 표현이지요.

마지막으로 교사들을 향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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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된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직업 1위가 교사라고 생각하거든요. 탤런트는 없어도 되지만….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 교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분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못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요. 이 책의 제목처럼(<시대를 뒤서가는 사람>, 정병오 저. 인터뷰 때 정병오 대표가 선물하였다) 살아가신다면 사회가 그것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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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씨를 인터뷰한다고 할 때 한 선생님이 꼭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다.
“연예인은 너무 주목을 받기 때문에 말 한마디 잘못해도 네티즌들에게 시달리기 쉽고 그래서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지난 아프간 사태 때 비난을 감수하고 나서서 그 분들이 보석 같이 귀한 분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돌을 던져서 안 된다는 발언을 했던 것을 보면서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 있게 행동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배우는 남의 삶을 자기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이다. 배우들은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에 대해 연구하고 감정 이입한다. 먼 나라 어린 아이들의 삶에 관심을 놓지 않고 이 땅의 역사 속 작은 소녀의 아픔에 감정 이입할 줄 아는 그를 보며 진정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과 인기에 훼손되는 않는 그의 꿈을 영화에서, 책에서 계속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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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삶으로 부르는 그의 종소리
‘잘가요 언덕’은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손 흔들며 이별하는 언덕이다. 바보 훌쩍이가 찾아낸 ‘오세요 종’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울려 퍼진다. 그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애통하며 그들과 함께 언덕에 서서 상처와 미움을 함께 떠나보내고,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초청하는 종을 울리고 있다.

                                                                         인터뷰 김진우  |  사진 조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