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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

괴물


아줌마 쌤의 계속되는 교사도전기 17

괴물


여름 장마

장마라고 하지만 매년 그 정도가 거칠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베란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뭇 두렵다. 깨 있었는지 남편이 생각을 보탠다.

“살아 있는 생명체야. 분노한 생명체.”

그러고 들으니 정말 창문을 부수고 들어올 듯 연신 걷어 차기를 멈추지 않는다.

비 때문에 잠이 어수선했던 탓인지 눈을 떴을 때는 7시. 늦었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큰아이를 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학교에서 문자 온 거 있나 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떻게 학교 가?” 그런데 바로 날라 온 대답 “없어.” 남편이 또 생각을 보탠다. “가지 마. 위험해.” 학교생활 내내 개근했다는 것이 아이들 나무랄 때 늘어놓는 자랑거리 중에 하나인데, 남편에게도 20층 창문을 죽어라 두드려대는 빗줄기가 심상찮게 들렸나 보다. 산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걷어 가게 만드는 것을 보면 ‘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같다.

 

주변의 괴물

몇 년 전 〈괴물〉이라는 영화를 가족들하고 함께 보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무책임한 실험과 방류로 오염된 한강에서 자란 기형 물고기가 결국 서울 한강에 버젓이 살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조금은 기상천외한 이야기. 영화를 놓고 많은 사람들의 평판이 있었지만 그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현실과 밀접한 개연성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는 거의 일치했다는 기억이 있다. 설마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로 끄덕거렸던 것이다.

며칠 전 버스 광고를 보니 〈7광구〉라는 이름으로 ‘괴물 2(?)’가 방영될 모양이다. 문득 ‘괴물이 누구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 우리 집에서도 괴물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집 괴물

제일 먼저 일어나 학습지 하고, 방학 숙제 책자 하고는 컴퓨터에 앉는 둘째. 약속된 1시간을 누리기 위해 아들의 목표 있는 행동은 굉장히 집약적이다. 씻는 것 생략, 먹는 것도 생략한다.

하루 중 가장 활기찬 그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들의 남은 하루는 늘 이렇게 날 따라다닌다.

“심심해. 뭐 할까? 엄마! 영화 하나 골라 놓을까? 나랑 같이 추억의 게임 할까? 나 노래 좀 다운 받으면 안 돼? 엄마, 지난 주 토요일에 20분 못한 거 오늘 할까? 텔레비전에 뭐하나 잠깐 볼까?”

슬금슬금 어슬렁거리며 달라붙는다. 내 입에서 “그러든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그러나 몇 번 당하며 이젠 그 이유를 알아 버렸으니 넘어갈 수가 없다.

아들의 목적은 ‘어떻게는 컴퓨터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 컴퓨터를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이유가 아빠 컴퓨터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아들은 올해 내내 돈을 모으고 있다. 자신만의 컴퓨터를 구입하기 위해.

성경 한 장 200원, 빨래 널기 500원, 수학 문제집 풀기 500원, 심부름 500원 등 항목은 나름 다양. 심지어는 누나에게 물 한 잔 가져다주면서도 ‘얼마 줄건대?’가 반응이다. 일찍 자라는 말에도 ‘그럼 얼마 줄건대?’로 통하는 아들. 물론 이런 괴물이 집마다 한두 마리 있기 마련. 학교에서도 가면은 쓰고 있지만 때때로 본성을 드러내는 괴물들이 아옹다옹 거리고 있다.

 

괴물과 괴물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누가 처음 했을까? 그 괴물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괴물이 되곤 한다. 〈괴물〉의 ‘송강호’처럼, 〈7광구〉의 ‘하지원’처럼.

물론 그들만큼 치열한 관계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는 점은 영화나 우리 현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는 그 괴물을 이해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난제다.

9월. 이 글이 읽힐 때쯤이면 장마가 끝나고 제법 가을 냄새가 날지 궁금하다. 장마와 태양 열기로 오랜 사투를 벌인 뒤 가을은 문득 고요해지는 계절이다. 사투의 결과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받아들이고 고요해진다. 남아 있는 흉터들조차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아름다운 빛깔로 빚을 줄도 안다.

그 괴물들과 새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9월이 내게는 꽤 근사한 시간이다. 벌써 반을 보냈다는 객관적 현실을 단순하게 보게도 만들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괴물들’의 상처와 흉터를 조용히 주시하며 피해자로, 사랑해야 할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만나는 괴물들도 이제는 어떻게 만져 주고 이해해 주어야 하는지 알 만큼 안 시간들이 아닌가. 경악하고 좌절하며 사투를 벌이던 1학기를 접고,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든 제 빛깔로 빚으라고 내게도 허락된 시간인 것이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예수님의 외로움을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부르시고 고치시고 먹이시고 사랑하시며 가르치시던 스승. 그렇게 3년간 함께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더 많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의 탄식을 들어야 했던 제자들. 수많은 기적으로 그분의 능력을 보고, 말씀으로 사랑을 들었으면서도 결국 십자가에 내주며 은근슬쩍 구경꾼이 되어 함께 조롱했던 사람들. 어쩌면 그들도 예수님에게는 괴물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괴물들이 끝까지 사랑하신 그분 앞에 결국 사람들로 거듭 태어난다.

 

9월, 이 기적이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괴물이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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