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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이렇게 사랑하라 하셨겠지



내가 읽은 책, 책이 읽은 나 39
이렇게 사랑하라 하셨겠지

『밀월일기』, 박 총, 복있는사람 
『점과 선』, 노턴 저스터, 분도출판사

권 일 한

 첫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홍역 앓듯 얼굴이 불그레해지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첫사랑은 열병처럼 지나갑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을 남깁니다. 세월에 무뎌진 노인들도 지금 첫사랑에 빠진 청소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 실패한 사랑, 말도 건네지 못한 사랑,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랑…. 사랑을 겪고 나면 사랑이 열병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흔적은 남지만 열병에 걸린 상태로 평생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함께할 사랑을 찾는 일을 무라야마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은 남녀가 한 몸에 붙어 있었다. 하나님이 한 몸에 붙은 두 남녀를 갈라놓았고 둘은 원래의 짝을 찾을 때까지 헤매고 다닌다. 정말 맞는 짝을 만나면 행복하게 살지만 다른 짝을 잘못 만나면 불행하게 된다.”

 결혼까지 성공한 사랑을 하고도 사랑을 이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 겁니다. 의젓해 보이던 남자가 결혼하면 서서히 아내에게 기대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유교 문화가 바라는 남편상, 아내상에 맞지 않으면 ‘공처가’, ‘애처가’라는 말을 붙여 일반인과 다른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라는 기준을 따로 갖지 않습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하라는 말씀을 아내들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

《밀월일기》는 1998년 여름부터 2000년 겨울까지 박총 님이 쓴 일기입니다. 시중에 나온 여러 일기와 달리 《밀월일기》는 ‘아내에 대한 사랑’만을 적은 특이한 일기입니다. 머리글에서 저자는 남자들이 혹시 이 책을 읽는다면 아내가 보지 못하게 감추라고 합니다. 아내가 보면 저자와 비교해서 틀림없이 바가지를 긁는답니다. 책을 읽는 여성들은 환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하면 이렇게 말할까요?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죠?

 저자인 박총 님은 2011년 4월, 《복음과 상황》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위키백과는 《복음과 상황》을 “복음주의 성격의 개신교 월간지다. …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 감정에 호소하는 얄팍한 잡지가 아닙니다. 이런 잡지의 편집장이면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 시대에 맞서 싸우는 의지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편집장으로 처음 낸 글에 ‘정부, 프랑스 시민 혁명, 동학 혁명, 4․19와 5․18, 체제, 권세, 아랍, 혁명 정신…’ 등의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대를 뒤서 가는 정병오 선생님, 무조건 달려 나가는 시대를 붙잡고 늘어지는 송인수 선생님 이 두 분 특징을 함께 가진 분일 것입니다. 이런 분의 마음에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놀랍습니다. (정병오, 송인수 선생님도 사랑이 많지요.)

 일기는 시종일관 이런 내용입니다. 아내가 이쁘다. 뽀뽀를 많이 했다. 아내를 위해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했다. 아내가 보고 싶어 왕복 7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출장에서 날마다 집으로 돌아왔다. 길 가다 보이는 들꽃을 꺾어 광고지 같은 종이에 싸서 아내에게 주었다. 길에 꽃이 없어 꽃을 샀다. 용돈을 아껴 선물했다. 28번째 생일에는 28가지 선물을, 29번째 생일에는 29가지 선물을 했다. 1주일 출장 가면서 7개의 엽서를 곳곳에 감춰 두고 찾아보라고 했다.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아내가 없는 동안 하루 종일 대청소를 했다. 아내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이런 일기는 처음 봤습니다. 아이가 천기저귀에 똥을 싸자 안해(아내를 이렇게 부른답니다)가 일어서기 전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데려가 씻어 주면서

 “아이, 참 예쁘게도 잘 쌌네! 앞으로는 계속 압바(아빠) 있을 때 싸요. 응?”

이라고 말합니다. 이분 정말 제정신입니까?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겠다고, 헌신하겠다고 한 말이 세월의 강물에 흘러가는 선심성 발언이라는 걸 한국의 모든 남자가 다 알지 않습니까 ! 아내들도 무뎌지는 남편 모습이 원래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나요? 이분도 처음보다는 사랑 표현도 줄고 은은한 모습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도 보통 남편들과는 너무 다릅니다. 정말 이 일기는 아내에게 보이지 않게 잘 감춰 두어야겠습니다. 다른 남편들보다 조금 나은 남편으로 보인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명백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여기 있으니까요.


눈 먼 사랑, 깨닫는 사랑

 점을 사랑하는 직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점은 도무지 생각이라고는 없는 것 같은 거칠고 단정치 못한 헝클이를 사랑합니다. 마구잡이로 엉킨 선을 보며 쾌활하고 자유롭고 거리끼는 게 없다고 좋아합니다. 헝클이는 직선에게 막대기처럼 뻣뻣하고 둔하고 외골수며 갑갑하고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위엄 있게 자신이 갈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선도 점점 우울해지며 헝클이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선은 열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 실패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방향을 바꿔 각을 만드는 방법을 찾습니다. 면과 굴곡을 만들며 ‘자유란 무질서의 허용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남몰래 삼각형, 사각형, 십각형, 사면체를 만들고 원과 타원까지 만들어 냅니다. 점과 헝클이 앞에서 눈부시고 재치 있게, 신비롭고 다양하게, 학식 있고 능란하게, 심오하고 기묘하게, 복합적이고  힘차게 모양을 만들어 냅니다.

 점은 문득 자유와 기쁨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질서와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습니다. ‘옛날에 한 또렷한 직선이 있었는데 그는 점한테 푹 빠져 정신이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우화집은 일정한 방향이 있는 힘이라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끝납니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읽어 주기에 좋습니다. 점과 선과 헝클이를 등장시켜 흥미롭고, 내용이 짧아 듣기도 편합니다. 깊이도 있습니다. 점이 헝클이를 사랑하는 모습은 눈먼 사랑입니다. 헝클어진 선들은 자유롭고 거리끼는 게 없어 보입니다. 야생마적인 정열이 넘칩니다. 직선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단조롭습니다. 재치 있는 말, 포장을 잘한 외형, 마음을 단번에 끄는 매력이 우대 받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일정한 방향을 가지지 않는 한, 사랑은 식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밀월일기》는 대놓고 사랑을 말합니다. 아내를 이렇게 사랑할 수도 있고,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외쳐댑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어 만들었기에 사랑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박총 님의 표현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우리는 사랑이 적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생각하는 절절한 사랑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집니다.

 우리는 헝클이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곧은 사랑, 방향이 뚜렷한 사랑, 전부를 내주신 사랑을 너무 자주 들어서 갑갑하고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는 대상을 찾습니다. 목적과 방향을 잃은 사랑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 건 아닐까요! 직선이 만들어 내는 온갖 선들의 향연을 도무지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창조주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능력이 없는 피조물이기에….

《점과 선》은 은근히 사랑을 말합니다. 점과 선, 헝클이를 등장시켜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도 사랑을 해봤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사랑도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밀월일기》의 남편처럼 그렇게는 안 됩니다. 예수님 사랑도 좋아졌다 나빠졌다 합니다. 한 방향을 향한 꾸준함이 없습니다.

 그래도 두 책을 읽을 때마다 찔림이 있기 때문에 자주 읽으면 제가 좀 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표현할 용기도 더 내고, 비어 있는 마음의 그릇에 이슬이라도 떨어뜨리기 원해서 읽습니다. 변해야 할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변해야 한다고. 이런 생각과 마음을 유지하려고 이 책들을 읽습니다. 여러분도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