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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사막에 꽃이 피고 빛이 비친다

 

내가 읽은 책, 책이 읽은 나 41
사막에 꽃이 피고 빛이 비친다


『사막에 숲이 있다』, 이미애, 서해문집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윌리엄 캄쾀바 외, 서해문집


《나무를 심은 사람》 아시죠! 장 지오노가 지은 책 제목이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분별없이 나무를 마구 베어 살벌한 바람만 불어대는 버림받은 프로방스 고원 지대에서 날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양치기가 주인공입니다.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을 길고 지루한 노동이지만 양치기는 포기하지 않고 나무를 심습니다. 가능할 것 같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노력으로 숲이 다시 살아나고 맑은 강물이 흐르며 새들이 지저귀는 생명의 땅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막에 꽃이 피고 동물이 뛰어노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다스릴 나라를 묘사했습니다. 성경에 33번 사용된 ‘사막’이란 낱말 가운데 11번은 이사야가 회복을 말하며 사용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이사야가 바라본 회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나라에 사막이 없기 때문에 사막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막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황량한 땅입니다. 그럼 한 곳이 있습니다. 북한입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곡식을 심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 내서 진짜 사막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북한을 회복할지 모르지만 북한이 왜 사막이 되었는지는 압니다. 복잡하게 흘러온 시대와 역사의 흐름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겁니다. ‘한 사람이 잘못 다스려서 죽음의 땅이 되었다.’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은 여자 인위쩐 이야기

 해마다 봄이면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옵니다. 중국 내륙에 가뭄이 들면 황사가 더 심해지고 비가 자주 내려 황사가 전혀 날아오지 않는 해도 있습니다. 황사의 진원지인 중국 내륙 네이멍구에 마오우쑤 사막이 있습니다. 누런 모래 언덕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예전에 이곳은 사막이 아니라 초원이었습니다. 나무도 있고 끝없이 풀밭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내가 쓸 동안은 괜찮다고 믿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목축을 하며 나무를 베었기 때문에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풀이 사라지고 흙도 날아가 버려 모래와 먼지만 날리자 사람들 역시 떠났습니다.

 바이완샹은 이곳에 남은 마지막 사람입니다. 사막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버티며 남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막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사막을 떠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 남았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대책도 없어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입니다. 이곳에 인위쩐이 시집을 옵니다. 아버지가 어설프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도 없는 곳에 인위쩐을 내려놓고 가버린 게 결혼식입니다. 처음 보는 누런 모래벌판, 집이랄 수도 없는 토굴에서 1주일 동안 운 게 신혼여행입니다.

 하지만 인위쩐은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해 멀찍이 떨어져 함께 운 바이완샹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새도, 풀도, 사람의 발자국도 없는 죽음의 땅에 인위쩐은 나무를 심습니다. 물이 없어 샤워는커녕 세수도 못해서 40일 만에 처음 본 사람이 그녀를 보고 놀라 도망가 버릴 정도입니다. 인위쩐은 그 사람이 남긴 발자국에 대야를 덮어 사람 발자국 본 기쁨을 며칠 동안 간직하기도 합니다.

 심은 나무가 죽어 울고, 또 심고 또 죽고 또 울고…. 시련을 겪으면서 경험이 쌓일 동안 포기하지 않고 또 심고 물 주고 또 심습니다. 사막에 조금씩 자라는 풀이 있는 땅이 더 좋다는 걸 알고 그곳을 찾기 위해 풀씨를 모아 뿌리고 나무를 심는 바보 같은 행동을 끝없이 합니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인위쩐은 20년 동안 1,400만 평의 사막을 숲으로 바꿉니다. 초원에서 양을 키우고 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가로수 길을 따라 차가 오갑니다. 단 한 사람이 사막을, 단지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겠다고 노력해서 이렇게 만듭니다.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말라위를 아십니까?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릴롱궤입니다. 기독교인이 80%여서 잘살 것 같지만 아프리카 최빈국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로 10번째입니다. 인구 1,500만 중에 의사는 단 260명, 인구의 14%가 에이즈 환자, 아동 천 명 중 110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합니다. 55명의 북한보다도 두 배나 높습니다. 2010년 말라위는 사막과 다름없는 나라입니다.

 80달러가 있으면 학교에 갈 수 있지만 말라위에서 자녀를 위해 80달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윌리엄 캄쾀바도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습니다. 말라위에는 충분한 전기가 없어 텔레비전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라디오가 가장 중요한 정보통입니다. 캄쾀바는 종종 고장 난 낡은 라디오를 분해하고 안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멀리 떨어진 사람의 목소리가 자기네 집에 들리는지 연구합니다. 트랜지스터를 끊었더니 소리가 줄어드는 걸 보고 트랜지스터의 역할을 알아내는 식으로 말입니다. 납땜인두가 없어 부엌에서 불을 달궈 금속 접합부분을 녹이는 식으로 라디오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이 학교에 갈 동안 캄쾀바는 혼자 바보가 되지 않으려고 도서관에 갑니다. 도서관에서 미국 정부가 기증한 책을 읽다가 발전의 원리,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원리를 배웁니다. grapes의 뜻을 몰라 사전을 찾아 쭈그리고 앉은 곳에서 《에너지 이용》이라는 미국 교과서를 발견합니다. 캄쾀바는 이 책이 자기 인생을 바꿨다고 말합니다. 책 표지에 풍차들이 돌아가는 풍경 사진이 있었습니다. 캄쾀바는 그걸 보고 풍차 만들기에 도전합니다.

 말라위에서 풍차를 만든다는 건 미친 짓입니다. 모든 부품을 고물상과 쓰레기장에서 구해야 합니다. 게다가 사람들 생각까지 바꿔야 합니다. 가뭄이 들자 풍차가 구름을 날려 버려서 비가 안 온다고 기계가 악마라고 합니다. 마법사의 탑이니 부숴 버려야 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캄쾀바는 온갖 조롱을 이겨내고 쓰레기장을 뒤져 부품을 모아 끝내 풍차를 만듭니다. 자전거 바퀴, 엄마 빨랫줄, 녹슨 트랙터에서 떼어 낸 송풍 팬, 나무로 만든 풍차가 바람을 잡아 집에 빛을 선물합니다. 전기는 마을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밤에도 밝게 지내고, 펌프를 통해 깨끗한 물을 공급 받습니다.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I tried and made it”이라고 답합니다.


사막에 희망의 꽃이 핀다

인위쩐은 나무를 심기 위해 아이를 말뚝에 소처럼 묶어 놓고 일을 했습니다. 자식을 잃고서 ‘아이가 없으니 나무에게 물 한 번 더 줄 수 있겠다’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하며 자신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캄쾀바도 트랙터 송풍 팬으로 만든 풍차 날개에 손가락 살점을 잃었고 집을 다 태워 먹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소망이 있었고 둘 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참 대단합니다. 두 사람은 불모의 땅에 희망을 심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요? 몇 번 실패하면 그대로 무너지는 게 정상입니다. 이런 걸 볼 때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주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호킹에게 능력을 조금만 덜 주셔도 하나님께 더 영광(?)되지 않겠습니까?

인위쩐은 어린 나무와 아이의 무덤이었던 사막에서 1,400만 평이나 되는 나무숲과 초원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캄쾀바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 두 사람과 비교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따라갈 수가 없네요. 하나님께서 사막에 꽃이 피고 강물이 흐르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기만 하면 오는 나라일까요? 그것도 아니네요.

하나님은 사막에 꽃이 피고 빛이 비치는 나라를 금세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에덴동산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드실 수도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하십니다. 믿음으로 소망하며, 인내로 감당하는 자녀와 함께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위쩐이나 캄쾀바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기도할 때마다 한 번씩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서까래 하나는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게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죄송한 모습으로 학교에 오면서도 여전히 아이들 앞에 서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학교에서 풀씨 하나를 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