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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여행 잘 다녀오셨나요?

내가 읽은 책, 책이 읽은 나 42

여행 잘 다녀오셨나요?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이레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하』, 박지원, 그린비

방학 동안 여행 잘 다녀오셨나요? 색다른 풍경을 찾아 비행기에 몸을 실은 선생님,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우리나라에도 숨겨진 비경이 많아서 자동차로 구석구석 누빈 선생님, 만족하시나요? 수련회에서 영적인 여행을 하고 오신 선생님, 아직도 은혜가 남아 있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단순한 일상을 벗어나 신비를 느끼고,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이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좋은 영혼의 울림을 찾는 여행을 하면 좋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일상에 여행이 새로운 물결을 일으켜 힘을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행을 잘 가지 않지만 제 딸들은 여행을 좋아합니다. 어디 놀러간다고 하면 들떠서 팔짝팔짝 뛰어다닙니다. 아이들 덕에 2~3년 전부터 저도 여행을 다닙니다. 처음 갈 때는 볼만한 곳, 먹을 만한 식당을 찾아봤습니다. 준비한 만큼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구경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이 이름난 곳에서는 실망을 하게 됩니다. 여행이 주는 기쁨은 우연히 오더라고요. 전라도 산자락에서 제멋대로 자란 것 같지만 멋들어진 향나무 숲, 유치환 기념관에서 만난 시, 토지 문학관에서 만난 박경리 선생의 원고가 〈1박 2일〉 여행지보다 더 좋습니다.

여행 가기 전에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의식주 모두 해결할 수 있는지 신경 써서 준비합니다. 몸 편히, 즐겁게 여행 갔다 올 수 있는 준비가 최고의 여행 기술입니다. 여행 가방을 사고, 알맞은 옷차림을 하고, 숙소와 음식점을 알아봅니다. 어디로 여행할지 찾는 순간, 여행의 기술이 시작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여행의 기술은 이런 준비가 아닙니다. 여행은 가서 보고 느끼고 즐기는 시간을 남기는 삶의 여정입니다. 순간보다 더 오래 남는 걸 위해 준비해야겠지요.

여행의 기술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많이 알아야 합니다. 사전 준비가 필요하지요. 가려는 곳을 잘 아는 사람이 안내해 준다면 사전 준비가 줄어들겠지요. 대관령 너머 영동 지방을 여행하려면 저를 안내자로 삼고, 관악구청 구내식당을 여행하려면 홍인기 선생님을 안내자로 삼는 셈이지요. 알랭 드 보통도 안내자를 동반합니다. 그런데 안내자가 이상합니다. 거기 살면서 구석구석 숨은 비경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눈으로 본 멋진 풍경이 아니라 고흐가 프로방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느끼며 여행합니다. 전라도 향나무 숲에 대해 쓴 제 글을 읽고 그곳에 간 여행을 다시 쓰는 식입니다.

이 책에는 9군데의 여행지가 나옵니다. 런던,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프로방스와 시나이 사막, 이집트를 여행합니다. 보통 여행 에세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자기가 가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시간이나 주제별로 써 놓은 기행문이 아닙니다. ‘런던에 대하여, 시나이 사막에 대하여’가 아니라 ‘기대에 대하여,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 습관에 대하여’ 적었습니다.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워즈워스와 대화하며,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와 ‘습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여행한 장소와 그곳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사람을 함께 소개해 줍니다. 작가, 화가와 장소를 연결 지어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여행을 시켜 줍니다.

책에 나온 장소 중에 시나이 사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생명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곳에서 알랭 드 보통은 욥을 여행 안내자로 삼습니다. 황량하며, 조작되지 않은 자연을 보며 숭고함을 느끼다 못해 구약에서 가장 숭고한 책인 <욥기>에서 욥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여행의 기술은 ‘인생 여행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여행 에세이라면 훨씬 가볍게 썼겠지요.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다 아시죠!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 연경(북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열하에서 연경으로 총 3천 리가 넘는 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일기입니다. 중국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을 따라 다니며 1780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썼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당연히 ‘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월 몇 일, 어디에서 무얼 했으며 무얼 보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적는 글 말입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행의 기술’이 아니듯이….

열하일기는 형식과 명분으로 스스로를 얽어맨 나라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연 개혁가의 마음을 찾아가는 마음 여행기, 철학 서적입니다. 박지원은 놀라운 장소, 멋진 풍경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봅니다. 형식과 명분에 억눌려 숨을 못 쉬고 사는 조선의 불쌍한 백성과 다르게, 중국인들이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는 이유를 찾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답(붓으로 한문을 써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어려움에도 뜻이 통하는 친구를 어디서나 만납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오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우리나라 백성을 도와주려는 간절한 마음을 글로 써내는 여행을 합니다.

또한 열하일기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박지원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 읽어 보면 알게 됩니다. 박지원은 옥전현이라는 마을에서 점포 벽에 쓰인 기이한 이야기를 촛불 아래 친구까지 동원해서 베껴 옵니다. 그 유명한 ‘호질’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갓끈 끊어지도록 웃게 하려고 이걸 베낀답니다. 해학이라고 하지요. 세대를 겨냥하는 날카로운 비판을 웃음에 담아 백성을 위해 살자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열하일기는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박지원의 글이 문체를 어지럽히고 백성들 마음을 흔든다는 신하들의 주청에 개혁적인 정조 대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만큼 시대를 깨뜨리려는 박지원의 마음이 컸던 때문이지요.

우리 가족이 여행할 때면 여행지에 있는 작가,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된 곳, 책에 등장한 장소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거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죠. 박지원이 일기를 해학이 넘치는 철학 이야기로 쓴 건, 그럴 수밖에 없는 박지원의 마음이겠지요. 이국적인 경치를 보는 기쁨을 넘어서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요.

 어떤 여행을 해야 할까?

지난 5월, 2박 3일로 수원 화성에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아이들에게 《수원 화성》, 《수원 화성과 정약용》, 《정조와 함께 떠나는 화성 기행》을 읽게 했습니다. 며칠 뒤에 갈 곳을 책으로 먼저 만나면서 딸들은 ‘정조와 정약용과 화성’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직접 만나러 가는 기분은 모르는 곳으로 향하는 기대감보다 훨씬 큽니다. 수원 화성을 몇 시간 동안 거닐면서도 기대하던 ‘암문, 봉돈, 동북공심돈,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을 보는 기쁨에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밤에도 성곽을 거닐며 추억을 쌓았습니다. 우연히 들어간 음식점의 음식 맛이 아주 좋아서 더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남들은 하루면 끝내는 곳에 2박 3일이나 있으면서도 신나고 새로웠던 까닭은 미리 준비하고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여행 기술’인 셈이지요.

이렇게 여행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는 건 눈에 잘 띕니다. 넓은 들에 피어 있는 꽃이 아무리 작아도 내가 알고 있으면 눈에 띕니다. 서점에 가도 평소에 관심을 둔 분야의 책이 눈에 띕니다. 넓은 쇼핑몰에서도 마음에 둔 물건을 사게 됩니다. 알면 한 번 더 보게 되고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여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미리 책을 읽고 갑니다. 이 정도 준비만으로도 여행이 달라집니다.

《여행의 기술》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한 존 러스킨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러스킨은 데생을 하는 사람이 대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본다면 새로운 것,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러스킨이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면 다르게 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면서 바라볼 겁니다. 비록 러스킨과 함께 여행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여행의 기술》과 《열하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라질 겁니다. 두 책을 읽으시고 아이들과 함께 2학기 여행, 의미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D. A. 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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