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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

시끌벅적 현장 학습 가던 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천재들 2

시끌벅적 현장 학습 가던 날

 

 

 

 

사라진 모자

출근하여 교실에 들어서니 다들 현장 학습을 갈 기대에 부풀어 한껏 기분이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날도 화창하고, 녀석들은 각자 제 자리를 지키며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습관처럼 “얘들아, 좀 조용히 기다려 줘야지?”라고 주문하고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부터 켰다. 그리고 주섬주섬 필요한 소지품을 챙겼는데. 호루라기, 장갑…. 어? 햇빛을 가려 줄 가장 중요한 모자가 보이질 않는다.

아차, 어제 인근 학교 행사에 갔다가 집으로 곧장 가는 바람에 집에다 두고 왔나 보다. 이제 모자 두 개를 모두 집에다 모셔 놨으니 어쩌지? 쩝, 할 수 없다. 즉석에서 조달하는 수밖에.

 

옆 반으로 모자를 꾸러 갔다. “선생님 취향은 아닐 텐데 어쩌죠?” 하시며 여벌로 있는 모자를 내어 주시는데, 고맙긴 하지만 이리저리 돌리고 뒤집고 아무리 다시 들고 봐도 색상이 정말 내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아쉬운 형편에 별도리가 없으니 그냥 들고 와서는 교실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폼을 잡아 봤지만 볼수록 좀 그렇다. ‘별 뾰족한 수가 없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근무 상황부를 들고 5반으로 갔더니 5반 선생님이 “이게 더 낫겠네요” 하시면서 흰색 운동모자를 내어 주셨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교실로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어느 게 더 낫냐고 물어 봤더니 쪼끄만 녀석들도 눈은 있는지, 운동모자가 더 낫다고 이구동성이다.

어쨌든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얼굴에 드는 햇빛은 가리게 됐으니 참으로 감사했다.

 

개구리 왕눈이

10분쯤 후에 출발해야 할 테니 주의 사항들이나 한 번 더 일러 줘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내로라하는 개구쟁이 훈이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선생님, 의자에 몸이 끼었어요. 좀 빼 주세요. 제발!”

그사이 작은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는 허연 뱃살을 드러내 놓고 빠져나오지 못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양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제 딴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놀래서 왕방울만큼 커진 눈을 보니 갑자기 〈개구리 왕눈이〉 노래가 퍼뜩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곱 번 넘어져도 일~~ 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

삘 릴리 삘 릴리 삘 릴릴리~♬

 

일전에도 수업 시간에 의자 끝에 앉아서 까불다가 벌렁 뒤로 나자빠진 적이 있었다. “드넓은 급식실 의자 밑으로도 기어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그 작은 교실 의자 밑으로는 왜 기어 들어가니? 청개구리처럼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고 싶지?”

정말 개구리 왕눈이 같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해 그냥 웃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살려 줘야지. 가까이 다가가서 의자 위로 몸통을 끄집어내려니 배가 걸려서 당최 빠져나오질 못한다.

“너 이제 큰일 났다. 배가 걸려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네. 할 수 없이 우리가 현장 학습에서 돌아올 때까지 혼자 그냥 그러고 있어야겠다.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이제 출발해야 하거든.”

“….”

 

잔뜩 겁을 집어먹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진 표정을 보니 두 번 다시 같은 장난은 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긴 했다. 그래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한 손으로 허연 배를 꾹 눌러서 위로 잡아당기니 다행히도 거짓말처럼 온몸이 쑥 빠져나왔다.

그저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서 몸살이 나는가 보다. 어쩌면 저렇게 쉬지 않고 매일같이 사건을 만들어 내는지.

“자, 이제 밖으로 나가서 조회대 앞에 모여 주세요.”

 

졸지에 빚쟁이가 되다

그때 뒤쪽에서 얌전하게 앉아 있던 호정이가 뚜벅뚜벅 앞으로 나와서 돈 천 원을 쑥 내밀며 다짜고짜 “엄마가 선생님 드리랬어요” 한다. ‘대체 이게 뭔 얘기지? 거금의 촌지도 아니고….’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아하, 소풍 가서 뛰어놀면 잃어버린다고 맡겨 놓으라는 뜻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저 돈을 맡으면 꼭 내가 잃어버릴 거 같은 예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럼 이따가 집에 갈 때 잊지 말고 선생님한테서 받아 가” 하고는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근데, 아뿔싸! 현장 학습 장소에 도착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감처럼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다. 오늘은 왠지 지갑에 신경이 쓰여서 지갑을 통째로 집에 두고 왔는데, 결국은 맡아 둔 돈 천 원을 잃어버리게 되다니….

“호정아, 마침 선생님이 지갑을 안 가져와서 오늘은 천 원을 갚을 수가 없게 됐어. 내일 꼭 줄게.”

시끌벅적 현장 학습 가는 날, 그래서 담임은 졸지에 빚쟁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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